본문 바로가기

어쩌냐 ㅠ.ㅠ

포항공대생의 동생글 실화 - 우리 형은 언청이었다.

 

포항공대생의 동생글 실화 - 우리 형은 언청이었다. 

 

 

천사의 길

 

 

 

우리형은 언청이었다.

 

 

1.

 

 

월말의 은행창구는 참 붐빈다. 

 

오늘은 선명회 후원아동에게 후원금을 부치는 날이다. 

 

그동안은 자동이체로 후원금을 냈었는데 지난달에 자동이체에서 지로로 바꿨다. 

 

대기표를 받고서 북적대는 사람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조금은 지루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 

 

물론, 자동이체가 편하긴 하지만......

 

형도 나처럼 이렇게 지루해 했을까? 아마 아닐 것 같다.

 

 

 

오늘에서야 나는 왜 형이 그 손쉬운 이체로 하지 않고 그렇게 고집스럽게 한달마다 꼬박꼬박 지로용지를 썼었는지 

 

형의 마음을 조금은 알 것 같기도 하다.

 

 

 

우리 형은 언청이였다.

 

어려운 말로는 구개열이라고도 하는데 입천정이벌어져서 태어나는 선천성 기형의 한종류였다.

 

 

세상에 태어난 형을 처음으로 기다리고 있던 것은 어머니의 따뜻한 젖꼭지가 아니라 차가운 주사바늘이었다.

 

형은 태어나자마자 수술을 받아야 했고,

 

남들은 쉽게 무는 어머니의 젖도 태어나 며칠이 지난 후에야 물 수 있었다.

 

형의 어렸을 적 별명은 <방 귀신>이었다.

 

허구한 날 밖에도 안 나오고 방에서만 시간을 보냈기 때문이었다.

 

밖에 나와 봐야 동네 아이들의 놀림감이 되기 일쑤였으니 나로서는 그런 형이 집안에만 있어주는 게 고맙기도 했다.

 

나는 형이 창피했다.

 

형은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전에 두 번째 수술을 받았다.

 

수술실로 형을 들여보내고 수술실 밖 의자에 꼼짝않고 앉아 기도드리던 어머니의 모습은 지금도 잊혀 지지 않는다.

 

형을 위해서 간절한 기도를 올리는 어머니를 보니 은근히 형에 대한 질투심이 들었다.

 

어머니는 나보다 형을 더 좋아했다.

 

가끔씩 자식들의 어린 시절을 회상하시는 어머니의 말씀 속에서 항상 형은 착하고 순한 아이였고,

 

나는 못 말리는 장난꾸러기였다.

 

형은 나보다 한 해 먼저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수술 자국을 숨기기 위해 아침마다 어머니는 하얀 반창고를 형의 입술위에 붙여 주시고는 했다.

 

나 같으면 그 꼴로는 창피해서 학교에 못 갈 텐데 형은 아무 소리도 않고 매일 아침 등교길에 올랐다.

 

형이 학교에서 어떻게 지냈는지는 잘 몰랐지만, 아마 고생께나 하고 있었던 것 같았다.

 

형은 장애 때문에 말도 더듬거리는 말더듬이였다.

 

나는 그런 형을 걱정해주기는커녕, 말할 때마다 버벅거린다고 <버버리>라고 놀렸다.

 

그래도 형은 공부를 잘했다.

 

항상 반에서 일등을 했다.

 

형의 성적표는 나보다 항상 조금 더 잘 나오곤 했다.

 

어쩌면 그런 형을 질투해서 더욱 그런 못된 말을 썼는지도 몰랐다.

 

언젠가 형이 어머니에게 무진장 매 맞은 적이 있었다.

 

내가 초등학교 2학년 때였다.

 

나는 만화와 오락에 빠져 있었는데 항상 용돈이 부족했다.

 

그래서, 매일 밤 어머니의 지갑에서 몇 백 원을 슬쩍하기 시작했다. 

 

바늘도둑이 소도둑 된다고 그 날은 어머니의 지갑에서 무려 오천 원이나 훔쳐서 숨겨 두었는데 다음날 아침 결국 발각되고 말았다.

 

어머니는 당연히 나를 의심했다.

 

어머니는 무서운 분이었다.

 

두려운 마음에 나는 절대 그런 적이 없었다고 잡아 뗐다.

 

다음에 어머니는 형을 추궁했다.

 

형은 처음엔 무슨 영문인 줄 몰라 했다.

 

나는 염치없게도 형의 대답에 한 가닥 희망을 걸고 위기를 빠져 나오기를 고대했다.

 

그런 나를 잠시 바라보더니 형은 어머니에게 잘못했다고 말했다.

 

어머니는 믿었던 형에 대한 실망과 배신감으로 몹시 화가 나셨고,

 

나는 죽도록 어머니한테 매 맞는 형을 그저 바라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애꿎은 형이 매 맞는 모습을 보니 철없던 나였지만, 형에게 그렇게 미안할 수가 없었다.

 

어머니가 방을 나가고 난 뒤에 방 한구석에 엎드려 있던 형에게 가까이 다가가 보았더니,

 

형은 숨도 고르게 쉬지 못하고 사시나무처럼 몸을 떨고 있었다.

 

​그 후 얼마동안은 형에게 <버버리>라는 말도 안 하고, 고분고분 지냈다.

 

그러던 어느 날 우리 동네에 쌈 잘하기로 소문난 깡패 같은 녀석이 형을 괴롭히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 녀석은 형과 나이가 같았다.

 

나는 형에게 빚진 것도 있던 참이라 그 자식과 싸우기 시작했다.

 

녀석의 코에서 코피가 터졌다.

 

나는 기세가 한껏 등등해져서 그 녀석을 더욱 몰아 부쳤는데 갑자기 형이 갑자기 나를 말렸다.

 

싸움이 한창 재밌어지려던 판이라 화가 났지만, 한사코 뜯어말리는 형을 생각해 물러났다.

 

그 후, 어떻게 된 일인지 형과 그 녀석은 아주 친해지기 시작했다.

 

 

2.

 

 

형에게는 사람을 아주 편하게 하는 장점이 있었다.

 

어느 날 TV에서 <언청이>라는 말을 난생 처음 들었다.

 

그 말이 바로 우리 형과 같은 사람을 뜻하는 것이라는 걸 알게 되었고,

 

며칠 후 형에게 버버리 대신 언청이라는 말을 함부로 불쑥 내뱉고 말았다.

 

그래도 형은 마치 오래전부터 그 말을 알고 있었던 것처럼 

 

내 머리에 꿀밤을 먹이면서 "그 말을 이제 알았구나?" 하며 담담히 웃어주었다.

 

그런 형에게 왠지 미안한 마음이 들어 다시는 형에게 언청이라는 말을 쓰지 않았다.

 

초등학교 5학년 무렵 어버이 날의 일이었다.

 

방과 후에 집에 돌아왔는데 어머니가 방안에서 소리 없이 울고 계셨다.

 

무슨 편지 같은 걸 읽으면서.

 

어머니는 잠시 후 그 편지를 낡은 핸드백에 소중하게 접어넣었다.

 

나는 어머니 몰래 핸드백을 열어보았다.

 

그 안에는 빛바랜 편지봉투부터 쓴 지 얼마 안 되는 편지까지 있었다.

 

나는 어머니가 조금 전에 읽었던 편지를 꺼내보았다.

 

형이 쓴 편지였다.

 

형이 매년 어버이 날마다 썼던 편지를 어머니는 그렇게 소중하게 모아오고 계셨던 것이다.

 

편지를 읽어보고는 왜 그토록 어머니가 형을 사랑하는지 조금은 알게 되었다.

 

내가 만약 형처럼 장애를 안고 태어났더라면 나는 틀림없이 부모님을 원망하고 미워했을 텐데 형은 그 반대였다.

 

오히려 자기가 부족하게 태어남으로 인해서 걱정하고 마음 아파하셨을 어머니에게 용서를 빌고,

 

또 위로하고 있었던 것이다.

 

형은 중학교에서도 항상 1등을 도맡아 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형이 일기를 쓰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가끔씩 형의 일기를 훔쳐보곤 했는데 형은 시인이었던 것 같다.

 

형이 지은 시는 이해하기가 쉬웠다.

 

아무리 무식해도 금방 이해가 되었고, 제법 감동도 주는 시였다.

 

 

나는 고등학교 때 갑자기 키가 부쩍 자라서 형보다 10cm는 더 커졌다.

 

얼굴도 곧잘 생겨서 여학생들한테 인기도 많았다.

 

나는 상대적으로 키가 작고 얼굴도 못 났으며 더욱이 말까지 더듬는 형을 보며 못된 우월감을 느꼈다.

 

하지만, 그런 사소한 것에 형은 전혀 무감각했다.

 

마치 이 세상 사람이 아닌 것 같았다.

 

어느 맑은 가을날이었다.

 

집을 나서려고 하는데 작은 참새 한 마리가 대문 앞에 죽어 있었다.

 

등교길이라 짜증이 났지만 나는 투덜투덜거리면서도 빗자루와 쓰레받기를 들고 나왔다.

 

참새를 쓸어 담아 쓰레기통에 버리려고 하는 나를 형이 잠깐만이라고 하면서 또 멈춰 세웠다.

 

나는 모처럼 착한 일을 하려는 나를 형이 칭찬해 주리라 기대했지만 그렇지 않았다.

 

형은 손수건을 꺼내 죽은 참새를 소중히 감싸안고는 집 뒤의 야산으로 올라가는 것이었다.

 

결국 형은 그 날 학교에 지각을 하고 말았고, 운동장에서 기합을 받았다.

 

다리를 콩콩 두드리며 계단을 올라오는 형에게 참새는 어떻게 했냐고 물어보니까

 

뒷산 양지바른 언덕에 묻어주고 기도를 올렸다고 했다.

 

그까짓 참새 한 마리 땅에 묻고 무슨 기도을 올려 줬냐며 궁시렁거렸더니 형은 슬픈 얼굴로 이렇게 대답하는 것이었다.

 

 

"만약 다음 생애에 내가 오늘의 너처럼 어느 집 앞에 쓸쓸히 죽어 있으면 그땐 네가 나를 거두어주렴."

 

 

형은 고등학교 2학년 겨울에 또 수술을 받았다.

 

형의 수술비로 집 한 채 값이 날라 갔다.

 

우리 집은 가난했다.

 

내 방은 고사하고 집을 가져 보는 게 소원이었다.

 

형의 수술비를 마련하느라 집안 형편은 항상 쪼들렸다.

 

아버지가 벌어 오는 월급으로는 어림도 없었다.

 

어머니는 언제부턴가 돈놀이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그야말로 악착같이 돈을 모았다.

 

채무자들을 정말 가혹할 정도로 심하게 몰아 부치기도 했다.

 

부동산에도 투자해 지금의 집도 용케 장만했다.

 

어머니는 정말 지독한 여장부였다.

 

극장에 가는 일도 한 번 없었다.

 

영화 볼 돈 있으면 차라리 맛있는 걸 사먹는 게 낫다는 주의였다.

 

그런 어머니를 보면서 형은 항상 안타까운 얼굴로 마음 아파했다.

 

자기 때문에 어머니가 저렇게 각박해 지셨다는 것이었다.

 

형은 어머니에게 짐이 될 만한 일은 한 번도 하지 않았다.

 

그래도, 어머니에게는 그런 형이 마음에 들지 않는 점이 딱 하나 있었다.

 

형도 허투루 돈을 쓰는 일은 거의 없었는데 길을 지나가다가 거지를 만나면 비록 없는 돈이지만, 동전 몇 푼이라도 성심껏 건네주었다.

 

절대로 그냥 지나치는 법이 없었다.

 

내가 아무리 저런 사람들 도와줘봤자 소용없는 짓이라고 해도 소용없었다.

 

그런 형의 행동을 어머니에게 고자질하듯 일러바치면,

 

어머니는 그런 형의 쓸데없는 타인을 향한 연민과 의협심 만큼은 탐탁지 않게 여겼다.

 

이듬해 겨울 우리 집에 경사가 났다.

 

형이 대학에 합격한 것이었다.

 

그런데, 형은 SKY로 대표되는 서울의 내로라하는 명문대를 다 마다하고, 지방에 있는 P공대를 지망해서 합격했다.

 

나는 참 알 수가 없었다. 형을 이해할 수 없었다.

 

형이 집을 떠나던 날...

 

나는 어머니가 그렇게 많은 눈물을 보이는 건 처음 봤다.

 

형이 떠난 아침부터 저녁 때까지 손수건이 눈에서 떨어지지를 않았다.

 

그런 어머니가 보기 싫어 혼자서 시내를 배회하다가 집에 돌아왔다.

 

있을 때는 잘 몰랐는데 형이 없으니까 집안이 텅 빈 듯한 느낌이 들었다.

 

형은 자주 편지를 썼다.

 

그리고, 어버이 날마다 선물을 들고 집에 찾아오곤 했다.

 

형은 어머니의 생일 때는 선물을 하지 않았다.

 

반드시 어버이 날에만 선물을 들고 왔다.

 

형과 어머니는 생일이 같았고, 띠까지 똑같았다.

 

삼계의 인연이 참 깊은 것 같았다.

 

형은 어머니의 생일에 태어난 것을 항상 미안하게 생각했다.

 

즐거워야 할 어머니의 생일날에 그렇게 끔찍한 모습으로 태어나 어머니를 슬프게 한 것이 마음의 짐이었을까?

 

그러고 보니 형에게는 백일 사진도, 또 돌잔치 사진도 없었다.

 

언젠가는 형이 어버이 날에 어머니에게 드릴 선물로 비싼 지갑을 사온 적이 있었다.

 

어머니가 그걸 보시고는 대뜸 하신다는 말씀.

 

"지갑은 벌써 하나 있는데 가서 다른 걸로 바꿔올 수 없나?"

 

형은 그저 빙그레 웃기만 했다.

 

하지만, 어머니는 그 지갑을 항상 지니고 다니셨다. 마치 형의 분신이라도 되는 것처럼.

 

 

3.

 

 

형은 대학교 3학년을 앞두고 또 수술을 받았다.

 

수술과 회복일이 개강시기와 겹쳐져 형은 한 학기 동안 어쩔 수 없이 휴학을 하게 되었다.

 

2년 만에 다시 형과 함께 지내게 된 어머니는 무척 기뻐하셨다.

 

형의 얼굴도 수차례에 걸친 수술 덕분인지 작은 흉터를 제외하고는 거의 정상으로 돌아왔다.

 

나도 힘든 재수 끝에 용케 Y대에 입학할 수 있었다.

 

그 해 봄부터 8월 여름까지 우리 집은 더없이 행복했다.

 

나는 어머니에게 어렸을 때에 형이 매 맞았던 사건에 대해 사실대로 말씀드렸고,

 

어머니는 그럴 줄 알았다면서 웃는 얼굴로 형과 나를 바라보았다.

 

형은 밤마다 어머니가 잠드실 때까지 어깨며 팔다리를 주물러 드렸다.

 

어머니는 나보다 형이 주물러 드리는 걸 더 좋아하셨다.

 

형이 안마를 해 주면 그렇게 편하고 좋을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아마 어머니는 사막 한가운데라도 형만 옆에 있으면 행복하고 든든해 했을 것이다.

 

매일같이 웃음꽃이 피었다.

 

8월 말이 되자 형은 복학을 하기 위해 포항으로 내려가야 했다.

 

어머니는 떠나는 형을 보내기가 못내 아쉬웠던지 한 학기 더 휴학하면 안 되겠냐고 얘기할 정도였다.

 

형은 어머니의 손을 꼭 잡고, 언제까지나 함께 있을 거라고 위로하고는 떠났다.

 

그렇게 또 몇 달이 흘렀다.

 

어머니의 생일이자 형의 생일인 초겨울이 가까워졌다.

 

생일을 불과 열흘 정도 앞둔 무렵이었다.

 

그 날은 왠지 기분이 참 안 좋았다.

 

어머니는 나보다 더 심각하게 느끼시는 것 같았다.

 

마치 심장이 위로 올라와 멎은 것 같은 느낌이 든다고 말하셨다.

 

그리고, 숨도 거칠게 몰아쉬면서 안절부절 못하시는 거였다.

 

나는 적지 않는 어머니의 나이로 인한 건강을 염려했지만,당신은 오로지 형만 걱정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형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것 같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하루 종일을 초조하게 보내던 어머니가 갑자기 불길한 전화 한 통을 받으시더니 얼굴이 혼비백산 새하얗게 질리고 말았다.

 

형이 교통사고를 당했다는 연락이었다.

 

 

어머니와 나는 부리나케 형이 있는 포항으로 내려갔다.

 

정말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의사선생님 말이 머리에서 피를 너무 많이 흘려 소생할 가망이 없다고 했다.

 

지금까지 숨이 붙어 있는 게 기적이라면서.

 

하얀 시트지를 가슴 위까지 덮은 형이 얼굴에 산소마스크를 쓰고 누워 있었다.

 

어머니는 초주검이 된 얼굴로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며 형에게 다가갔다.

 

떨리는 두 손을 모아 누워있는 형의 손을 꼭 잡으셨다.

 

그 순간이었다.

 

연약하게 뛰던 형의 맥박이 조용히 긴 수평선을 그리기 시작했다.

 

마치 사랑하는 어머니를 여태 기다리다가 그제서야 안심하고 떠나는 것처럼...

 

차도를 무단 횡단하던 어린 여자아이를 트럭이 덮치려는 순간, 형이 앞에 뛰어들었다는 것이었다.

 

다행히 여자아이는 팔을 조금 다쳤을 뿐인데 트럭에 치인 형은 몸뚱어리가 종잇장처럼 날려가면서

 

머리를 땅에 심하게 부딪혔다고 한다.

 

어머니는 아예 넋이 나가고 말았다.

 

나도 형을 잃었다는 상실감과 슬픔에 눈물이 북받쳐 흘렀지만, 가슴 한쪽에는 이런 생각이 들었다.

 

 

(참 형다운 최후였구나...!)

 

(하느님이 천사를 그렇게 오랫동안 지상에 내버려 두지는 않을 테니까...)

 

 

그 후 우리 집은 무덤과도 같았다.

 

어머니는 음식은 커녕 물조차 드시지 않았다.

 

어머니는 형을 영영 보내고 사흘이 지나자 온몸이 불덩이처럼 달아올랐다.

 

지독한 열병이었다.

 

급히 의사를 불렀지만 의사는 영양제를 놓아줄 뿐, 환자 스스로 아픔을 털고 일어나야지 별다른 처방은 없다고 했다.

 

나는 무서운 생각마저 들었다.

 

어머니는 마치 당신의 생일날, 아니 형의 생일에 맞춰 돌아올 수 없는 저 먼 곳으로 형을 따라 가려고 하는 것 같았다.

 

드디어 어머니와 형의 생일이 돌아왔다.

 

하나도 기쁘지 않은, 슬프고 고통스런 생일이라 더욱 마음 아팠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때 밤새도록 내린 눈으로 온 세상은 새하얀 설국이었다.

 

그렇게 예쁘고 빛나는 눈은 처음이었다.

 

그날 오후에 초인종이 들렸다.

 

나는 대문을 열었다.

 

수백송이의 아름다운 꽃송이가 깊은 슬픔에 빠져있는 집으로 배달되었다.

 

눈처럼 희고, 와인처럼 관능적인, 형과 어머니의 핏빛을 닮은, 붉고 흰 장미꽃이었다.

 

바로 형이 보낸 것이었다.

 

몹시 수척한 어머니가 정말 기적처럼 대청에 나오셔서 그 광경을 바라보고 계셨다.

 

어디서 그런 기운이 나왔는지 애써 문틀에 의지하며 서 계셨다.

 

나는 형이 남긴 짤막한 생일 축하카드를 어머니께 보여 드렸다.

 

 

"어머니, 오래 오래 행복하게 사셔야 돼요.

 

언제까지나 어머니 곁에 자랑스런 아들로 서 있을게요."

 

 

어머니의 눈에 마른 줄 알았던 눈물이 다시 터져 나왔다.

 

형이 교통사고를 당하기 바로 전날,

 

어머니의 생일에 맞춰 배달해 달라고 미리 예약해 두었던 것이었다.

 

생일에는 절대 선물을 하지 않던 형이.

 

문득 마당에서 맴돌고 있는 참새 한 마리가 눈에 띠었다.

 

언제부터인지 모르고 있었는데 예쁜 참새 하나가 마당에서 날갯짓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관심을 보이는 걸 알았는지

 

참새는 날개를 파닥거리며 솟아 올라 마당을 한 바퀴 빙 돌더니 

 

하늘 높이 날아오르기 시작했다.

 

여태까지 그렇게 높이 나는 참새를 본 적이 없었다.

 

그렇게 아득히 날아오르더니 참새는 하늘 속으로 끝내 자취를 감추었다.

 

그 날 이후 어머니는 조금씩 기력을 찾기 시작했다.

 

어머니의 눈빛이 바뀐 것을 알게 된 것은 그로부터 며칠 뒤였다.

 

항상 돈에 얽매이고 근심걱정이 가시지 않던 어머니의 얼굴에 조용한 온기와 평화가 감돌고 있었다.

 

그리고, 어머니는 성당에 다시 다니기 시작했다.

 

원래 어머니는 옛날부터 독실한 천주교도였다고 한다.

 

어머니의 세례명이 <아네스>라는 것도 처음 알았다.

 

또 형의 유품을 정리하다가 형이 <선명회>라는 자선 단체에 가입하여 한 어린이를 돕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아이의 후원은 형을 대신해서라도 내가 쭉 이어나가고 싶었다.

 

내가 누군가를 돕는 일을 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지만, 

 

어쨌든 한 달에 한 번씩 얼마 안 되는 돈을 지로로 부쳐주면 그만이라 별로 신경 쓰이진 않았다.

 

내가 누군가를 후원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까맣게 잊고 있을 정도였는데, 아이가 불쑥 우리 집을 찾아왔다.

 

크리스마스 날에 온 작고 귀여운 산타클로스였다.

 

매년 크리스마스나 새 학기가 되면

 

형은 어김없이 학용품과 격려 편지를 써서 아이에게 우편으로 부쳐주며 용기를 북돋아 주었고, 

 

이번 성탄절은 꼭 감사인사를 전하기 위해서라도 만나기로 약속했다는 것이었다.

 

아이는 너무 천진난만한 얼굴로 형이 보고 싶다면서 어디 있느냐고 물었다.

 

차마 형이 죽었다는 말을 할 수 없었다.

 

사정이 있어서 하늘 멀리 다른 나라에 가 있다고 둘러댔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다음에 또 만나기로 약속하고,

 

뒤돌아서는데 뒤에서 그 애의 목소리가 내 가슴을 울렸다.

 

 

"그렇게 좋은 형과 한 집에서 매일같이 사시니 얼마나 행복하세요?"

 

 

바보같은 나는 그제서야 깨달았다.

 

형과 지낸, 지난 이십여 년 간의 시간이 얼마나 행복 했었는가를....

 

나는 왜 그렇게 어리석었을까?

 

아이에게 뭐라고 대답을 해주어야 할 텐데 갑자기 목이 메었다.

 

그 순간 언제나 나에게 따뜻한 미소를 보내주던 형의 다정한 얼굴이 떠올랐다.

 

내가 매일같이 동네 아이들과 어울렸을 때 혼자서 방을 지키던 우리 형은 얼마나 외로웠을까?

 

학교에서 아이들에게 괴롭힘을 당해 말까지 더듬거리던 우리 형에게 위로의 말은커녕

 

그보다 더 괴롭히기만 했던 나는 얼마나 못 됐고, 나쁜 동생이었던가?

 

그런 못난 동생을 위해 매까지 대신 맞아주던 착한 우리 형...

 

 

아이에게 눈물을 보이지 않으려고 애쓰면서 천천히 돌아서서 이렇게 말했다.

 

 

"그럼 얼마나 행복했는데... 그렇게 좋은 형이 있어서 나는 참 행복하단다."

 

 

하지만, 전혀 때묻지 않은 천진한 눈망울의 아이와 눈이 마주친 순간,

 

나는 그만 눈앞이 부옇게 흐려지고 말았다.

 

 

솔직히 이 아이한테 형이 했던 것처럼 잘 할 자신은 없다.

 

그래도 한번 열심히 노력해 볼 생각이다.

 

그래야 천사의 동생이 될 자격을 갖게 될 테니까.

 

 

http://pds.catholic.or.kr/pdsm/bbs_view.asp?id=24019&mwtype=S&menu=4821

 

우리형

우리형

pds.catholic.or.kr